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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기관 및 단체 유격군전우회

개요

국제연합 한국유격군은 6.25한국전쟁기간중 북한지역과 38도선 접경지대에 거주하던 청년학생들이 '반공'의 기치아래 '자유의 의병'으로 자생적인 무장 유격부대들을 조직하여 적치하의 북한 내륙과 동.서해연안 및 도서지역에서 게릴라전,특수공작,첩보활동,심리교란전, 양민구출 등을 전개한 '반공빨치산부대'들의 총칭입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자유의 의병'으로 참전한 총병력은 무려 3만여명에 달하였으며, 그들은 대체로 출생연고지 중심으로 약30개의 단위부대로 편성되었고, 처음에는 미8군, 다음에는 미극동군사령부와 연계하여 유격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되면서 유엔군의 보급지원 종료와 철수지시에 따라 각 부대는 남한으로 이동철수하여 대기하던중 한국정부와 유엔군사령부와 협약에 따라 1954년 2월에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됨으로써 자동해체되었습니다

연혁

  • 북한지역과 38도선 접경지대에

    거주하면서 반공사상을 지녀온 많은 청년학생들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입대를 거부하고 지하와 산중으로 피신한 다음 반공결사를 조직하였고 유엔군의 북진에 때를 맞추어 무장봉기를 감행하여 수복된 고향땅에서 치안대, 청년단, 학도호국대 등으로 공비소탕과 치안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불법참전으로 유엔군이 철수하게 되자 반공치안대, 청년단, 학도대 등은 향토사수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진행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동서해 연안도서로 철수하거나 북한내륙의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자생적인 반공유격대가 되었습니다.

  • 1951년 2월에 미8군사령부 비정규전과는

    이들 자생적 유격부대의 전략적.전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상호 협조관계를 형성키로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8군 비정규전과 장교단은 서해안의 백령도와 강화도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유격부대들에게 보급지원과 해상.공중에서의 작전원호를 담당하였고, 각 유격부대는 인사.작전면의 독자성을 가지고 대공게릴라전을 본격화하였습니다.

  • 1951년7월부터는 유격부대에 대한

    관장업무가 미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KLO.제8240부대)로 이관되었으며, 동해안사령부가 추가되었고 본부 직할 첩보공작대도 증편되었습니다.

  • 1951년2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0여개의 유격부대들은

    북한지역 연안일대와 적지내륙을 작전지역으로 하여 해안선침투 상륙작전, 공산군배후 습격, 교량.교통망 파괴, 공수특전 침투 등을 전개하여 공산군 3개군단(함경도와 평안도 연안에 2개 군단, 북강원도와 함경도 연안에 1개 군단)을 견제하는 전략적 효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포항과 원산항의 입구를 봉쇄하여 동.서해 제해권 확보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 유격작전은 또한 군사정보수집, 유엔군 조종사 구출, 양민북한탈출 안내,

    도서지역 주민 생활안정 등 부대적 효과도 매우 컸으며, 적지않은 인민군 군관.사병들이 유격부대에 귀순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기간중 한국유격군의 활동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적지에서 활동하는 특수작전이므로 군사기밀로 취급되었으며 휴전 이후에도 미군당국이 2급 비밀로 분류하여 관리해 왔기 때문입니다.

  • 유격부대에 대한 기록문서는 1984년에 이르러

    (휴전후 30년 경과) 비밀등급 하향으로 일반문서화 되어 비로소 공개하게 되어 '국제연합한국유격군'의 실체가 햇빛을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미 육군성 기록에 의하면 전쟁기간중 한국유격군은 대.소규모의 전투 4,445회를 감행하였고, 약 7만의 적을 살상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 휴전 성립후 1954년 2월 유격군 30여개 부대는

    국방부 제8250부대로 통합되었다가 육군부대로 분산편입 되었으며, 유격군간부중 753명이 현지임관 (소위~소령)되었고, 대원 약 12,000명이 하사관.사병으로 현지입대됨으로써 발전적인 부대해체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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